2008.9.22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622번지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거조암은 은해사의 산내암자로서 居祖寺라는 이름으로
신라 효성왕 2년(738년) 원참조사께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거조암은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권수정혜결사문을 공표한 도량이다.
거조암 영산전....국보14호
거조암 526나한상...
거조암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04호
거조암 홈페이지
http://www.geojoam.or.kr/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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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를 찾아 떠나는 절, 기도도량 거조암 (대구신문특집)
거조암의 간결미에 넉잃고 오백나한의 친근함에 빠지다
팔공산은 남쪽에 동화사를 두고 동쪽에는 은해사를 두고 있어 고대부터 법화를 키운 명산으로 이름 나 있다. 그 팔공산 자락에
거조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지금은 은해사의 말사로 추락하고 말았지만 옛날에는 거조사라는 이름을 달고 불교문화사에서 간
과할 수없는 족적을 남긴 곳이다. 고려시대 때 부패와 타락에 빠진 불교현장을 혁신코자 정혜결사의 결의를 다진 곳이며, 오백
나한을 앞세워 대중과 하나 되는 불교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던 곳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자를 모르는
채, 초라한 석탑 하나와 구전에 의해 신라에 창건한 사찰임만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절터의 면모로 볼 때 거조사 시절에는 꽤
나 큰 가람을 갖추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지금은 영산전과 국사전 등 4동의 건물만 덜렁하게 옛터를 지키고 있다.
국보14호인 거조암 영산전. |
거조암이 뿜어낸 역사의 실타래 중심에는 영산전과 오백나한이 있다. 거조암이 거친 세월을 헤치며 결사의 도량으로 이름을
날린 까닭도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세상 번뇌와 망상을 가늠하기
위해 거조암 영산전에서 정혜결사의 촛불을 들어 불교가 다시 석가모니의 참 가르침을 본받아 오로지 수행으로 참 불교의 길
을 걷자고 다짐했었다. 그 결정체가 불교사에 길이 빛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다. 요즈음 같으면 시국선언문과
같은 이것을 이곳 거조암에서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영산전이 무엇인가. 석가여래가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파하고 있는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한 영산회상도를
모시고 있는 법당을 말한다. 거조암 영산전은 우리나라에서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예산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흔치 않
은 고려시대 건축물이며, 영산전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도 영산전에 들어서면 강당 같은 넓은 법
당에서 고려시대 큰 스님 지눌이 뜻을 같이하는 많은 스님들을 모아 놓고 참 수행의 길을 설파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거조암 영산전은 여느 절집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장엄과 아름다움을 지닌 건물이다. 넓이는 세 칸인데 길이는 일곱 칸이
나 되는 긴 건물이다. 법당 건물로는 아주 특이하다. 지붕은 사람인(人)자를 그려 놓은 듯 간결함을 갖춘 홑처마 맞배지붕을 하
고 있다. 안팎 어디를 쳐다봐도 흔히 볼 수 있는 단청 하나 없어 간결함에 더해 소박함 마저 느끼게 한다. 무심코 쳐다보면 해인
사 장경각처럼 경판고를 연상케 한다. 긴 건물에 어간문 하나만 달랑 있고 나머지 벽면에는 자유롭게 빛과 바람이 드나들도록
살창만 설치하였다.
좁다란 어간문을 들어서면 맞은 편 중앙 벽면에 문수 보현보살의 위호를 받으며, 석가여래불이 굽어 내려다보며 서 있고, 그 뒤
에 이 건물이 영산전임을 알리는 영산탱이 걸려 있다. 영산탱은 전반적으로 붉은 색조에 호분으로 그린 선이 유화처럼 보이게
하고, 굵게 뻗어가다가 가늘어지는 붓의 터치가 나르는 듯 생동감을 안겨 준다.
영산전 내부 오백나한상들. |
삼존불을 마주하며 좌우, 천정을 쳐다보라. 긴 건물이지만 칸막이 하나 없이 넓게 틔어 있어 뛰어난 공간감을 준다. 살창에서
흘러드는 따뜻한 햇살이 넓은 공간을 은은히 밝히고 있다. 배 나온 기둥위에 간결한 들보가 지나가고 들보 위 천정은 속살
까지 다 드러낸 연등천정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꾸밈이 없다. 그러면서 장엄하고 웅대한 멋을 준다. 그래서 영산전은 일부러
만든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거조암은 결사의 도량이기 전에 기도도량이다. 거조암에는 대중이 기도하면 소원을 손쉽게 들어 주어 석가모니 부처보다 더
가깝다고 일러 온 526분의 석조 나한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거조암을 ‘오백나한절’이라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오백나
한은 석가모니 멸도 후 첫 번째 모임때 모인 가섭존자를 비롯한 5백여 명의 제대성중을 가리킨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는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의 자연스런 표출로 나한에 대한 신앙이 상당히 컸다. 거조암 오백나한은 청화스님이 영산전을 만들
고 오백나한을 모실 당시 신통력을 발휘하여 하루 밤에 조각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거기다가 오백나한이 스스로 제자
리를 찾아 오늘날과 같은 배열을 하였다고도 전한다.
오백나한은 영산전 외벽과 가운데 기둥 열을 따라 2중으로 배열되어 있다. 실제로는 영파 성규가 조선 순조때 조성하였으며,
극락도를 따라 배열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가운데 불단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거느린 석가여래가, 그 곁에 아난과 가
섭을 비롯한 석가의 10대 제자와 16나한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에 줄지어 다른 나한들이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마치 석
가가 영축산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하는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나한상은 다른 불상조각과 달리 일정한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승들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
징이다. 그래서 거조암 오백나한도 어떤 시대적 양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고승들의 개성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표정들에 마치 캐리커처 콘테스트를 보는 듯 재미있다. 박장대소하는 나한, 소라 부는 나한, 한입 손 집어넣고 익살
떠는 나한 등 하나같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조각으로 희노애락을 저리도 다양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숱한 표정을 그려내고 있다. 그 속에는 시골 정자나무 밑에서 장기 두며 노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그려 볼 수 있고, 혹한 가뭄에
농사 망쳐 근심하는 농부의 모습도 그려 볼 수 있고, 만선에 기뻐하는 어부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그래도 그 많은 나한의
표정들이 주는 공통점은 편안함이다. 그래서 앞에 서면 하나같이 친근함으로 다가 온다. 이런 까닭에 나한은 대중에게 가장
가깝고 절친한 예배상이 되었으리라.
오백나한 앞에는 오늘도 기도하는 사람들로 들끓는다. 매월 7일에는 성대히 나한재도 올린다. 대중들은 나한상 앞에 쌀과 꽃,
동전과 함께 만발삼종공양을 올린다. 만발공양을 올리면 비는 소원보다 더 많은 소원을 들어 준다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다.
지금은 오백나한이 각자 이름표를 달고 있다. 1995년에 오백나한의 명호가 적혀있는 ‘오백성문청문’이라는 고서를 발견하여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결사도량 거조암, 기도도량 거조암에서 한번쯤 정신 가다듬고 혼탁한 세상을 반추하고, 우리 스스로를 뒤돌아보는 것은 어떨
지. 그리고 지친 삶 어루만지며 정토를 염원해 보자. 옛 고승 지눌과 오백나한의 가르침이 있어 언제나 어버이처럼, 그리고
스승처럼 누구라도 기꺼이 맞이하여 천 갈래 만 갈래 번뇌와 망상을 다스려 줄 것이라 믿고 말이다.
대구신문 특집 이영진의 '다시보자 우리향토문화'-열아홉번째이야기
<경북과학대학 교수>
입력시간 : 2008-07-28 10:23:45
영산전이란 석가여래께서 영축산(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說)하고 계신 장면을 극적으로 그린
영산회상도를 모시기 위해 특별히 지은 법당을 말한다.
거조암 영산전은 얼핏 보면 건물전체가 경판고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으나 이 건물내부에는 석가여럐, 문수보현,
오백나한이 봉안되고 있다. 간결하고 단순한 건물이지만 내부공간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공간감이 훌륭하다.
또 중앙켠 벽에도 널직한 살창을 두어 조명과 환기의 구실을 하도록 잘 설계되어 있다. 기둥이 모습을 볼 때도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되어 배흘림(엔타시스)이 특이하고 내부의 천정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연등천정으로 되어
주심포계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영산전은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지어진 건물로 상언이 그렸다는 영산회상도와 청화화상이 앞산의 자연석을 이용
하여 만들었다는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526분의 나한성중을 모시고 있다. 영산전은 현재 국보 제14호
지정되어 있는 나라의 보물이다.
영산전 오백나한
석가여래가 열반에 드신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이 세상의 불법을 수호하도록 수기받은 분들을 가리키며 응공(應供) 또는 응진(應
眞)으로 번역된다.
오백나한은 5백명의 아라한과를 증득한 존자(尊者) 즉, 성인의 무리로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석가모니 멸도 후 1차 결집시에 모인
가섭존자를 비롯한 5백여 명의 제대성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불교가 극도로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 표현의 자연스런 표출로 나한에 대한 신앙이 상당히 커져 있었으며, 이 나한상의 조각형태는 일정한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승들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500여 분의 나한이란 많은 부류의 사람을, 다양한 공부(참구)방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누구나 성중님들과 같은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는 그래서 모든이는 불성을 담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스님은 선방이나 아니면 나름의 참구방법으로, 재가자는 사회 직능별 각 분야에서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도(道)에 도달할
수 있다는 나한정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