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

경주 낭산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행운57 2009. 12. 1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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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2.

 

<경주 낭산 사적 제163호>

 

 경주 낭산(狼山)은 경주시 구황동, 배반동, 보문동에 걸쳐 있는 해발 102m의 산으로 사적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경주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었다. 산허리는 잘록하며 높이는 108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옛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불리며 신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은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 올랐다. 나라에서는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로는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이 살았으며, 문창후 최치원이 공부하던 독서당도 있다.

 

남쪽능선에는 선덕여왕의 능이 있고, 그 아랫쪽에는 호국사찰로 알려진 신라 향가의 현장 사천왕사터가 있다. 동북쪽에는 황복사터와 삼층석탑이 있으며, 서쪽 중턱에는 낭산 마애삼존불이 있고, 그 주변에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등이 남아 있다.

 

 경주 낭산을 둘러 보기로 하였다. 울산에서 경주방향으로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도로 우측으로 제일 먼저 사천왕사터가 있다.

 

<사천왕사지 - 사적 제8호>

 

사천왕사지(터)는 사적 제8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으로 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 경주 낭산(狼山)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사천왕사지는 제4차 발굴조사가 진행중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청동불상 1점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사천왕사지(문화재청 자료) - 현재는 발굴작업중으로 다른 모습니다.

 

사천왕사지 인근의 임시주차장에서 선덕여왕릉 이정표를 따라서 낭산으로 접어 들면 아름다운 소나무숲을 만난다. 눈으로만 보아도 아름답지만 실제로 그 길을 걸어보면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과거에는 찾는 이가 없어 호젖한 숲길이었지만 지금은 드라마 선덕여왕의 방영에 힘입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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