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번지 천등산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의성 고운사의 말사다.
봉정사 대웅전(국보 제311호) | |
대웅전의 건립 연대는 자세한 사료가 없어서 정확한 연대를 알지 못하나 건물의 일부를 해체하여 수리할 때 일부분의 묵서명이 발견되어 추정이 가능하다. 이 대웅전은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최고의 목조건물이라 추정된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자연석의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이다. 겹치마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을 한 이 건물은 산 중턱에 세워진 건물이면서도 평야를 끼고 있는 지역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원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려 놓았으며, 주간이 넓고 오포작(五包作)이라서 포벽(包壁)이 넓게 보이는 반면 기둥은 짧게 보여 매우 안정감을 준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 모두 2출목으로 외부쪽으로는 쇠서형이며 내부쪽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짜여 그 수법이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예는 툇간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전면 3칸은 전부 개방하고 문비를 설치하였는데 궁판 받친 띠살무늬의 사분함(四分閤)이다. 이 문짝은 앞의 쪽마루와 함께 후대의 구조물이다. 기둥위의 공포도 간의 높이를 낮게 하여 기둥의 기초로부터 처마 끝까지의 간격이 다른 다포집에 비하여 작다.
가구(架構)는 일고주구량가(一高柱九樑架)인데 천장이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어서 상부 가구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지붕은 팔작으로 비교적 처마 깊이가 깊고, 처마는 겹처마로서 네 귀의 추녀끝에는 활주를 받쳐 추녀마루를 지탱하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널마루를 전면에 깔고 내부 고주(高柱)를 이용하여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었고 고주 앞에는 불단을 짜서 불상을 모셨다. 불단은 150cm정도의 높이로 만들고 청판에는 연화문을 조각하여 장엄하였다. 불단 위에 연화좌를 놓고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은 높이 150cm정도이고 좌 우 협시불인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은 높이가 130cm정도 크기이다.
불단 위쪽은 아름다운 소란반자를 설치하고 그 중심에 따로 닫집을 대신해 보개를 구성하여 장엄미를 추구하였다. 보개의 천장에는 구름이 둥실 떠 있는 하늘을 두 마리의 황룡과 백룡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 하늘의 신비함과 권능을 표현하였다. 보개 아래의 본존상 뒷벽에는 불벽(佛壁)을 조성하였다. 대량(大樑)에 세운 간주(間柱)를 의지하여 벽체를 구성한다. 간주에는 아래 위로 주의(柱衣)를 입히고 그 사이에 기둥을 감싸안으며 상승하는 용을 장엄하게 그렸다. 불벽의 앞쪽에는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걸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등을 배치한다.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는 강희(康熙) 52년(1713) 윤(潤) 5월 1일 제작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80cm, 세로 360cm이다.
후불탱화를 보수하기 위하여 불사를 할 때에 희귀한 벽화 형태의 후불탱화가 하나 더 발견 되었는데 이 탱화는 수미단과 보개를 연결하는 주불 뒷벽에 채색으로 그려진 가로 세로 약 417cm 크기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관무량수경을 설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변상도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꽃비의 표현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고려 변상도의 상단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구도, 벽화 테두리의 연화 당초문의 색상과 기법이 건물 내부 단청과 유사한 점, 벽화가 훼손되어 1712년에 새로이 후불탱화를 제작하여 봉안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대웅전 초창기 때 그려진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초기 불화자료가 희귀하고, 조선 전기 이전의 후불벽화도 1476년에 그려진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 3존도가 유일한 것임을 감안할 때, 이번에 발견된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는 우리나라 불화의 도상과 양식 연구 뿐 아니라 회화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 |
대웅전 외부벽화
대웅전 삼존불
대웅전 수미단 문양
극락전 (국보 제15호)
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건물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극락전 해체 보수공사 때에 1625년(인조3)에 작성한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이 상량문은 '천계 5년 3월'에 중수하면서 작성한 공사 기록인데, '前中創至正 二十三年 癸卯 三月日'이라는 구절이 있다. 중창은 중창(重創)을 의미하며 지정 23년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께서 개창하였다고 상량문의 신라 때에 창건은 이를 가리킨다. 공민왕 12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은 이보다 오래 전에 이미 건물이 조영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갑석을 올리고 크기가 다른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구조이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다. 공포는 외 1출목 주심포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가구는 9량가인데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고주 2본이 뒤쪽에 있다. 그러나 평주상의 대량과 퇴량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높이로 만들어진 특색을 보인다. 다른 법당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대량은 단면이 청자매병의 윤곽을 연상시킨다. 굵지않은 목재를 홍량으로 다듬어 걸었는데 이로 인하여 중첩하는 부재가 거듭됨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맛을 덜고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에 방전을 깔고 뒤쪽에만 2개의 고주를 세워 그 사이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맞춘 뒤 다포식 구성을 지닌 지붕을 씌워 집을 마련하였다.
극락전이 지닌 몇 가지 특징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계승된 이른바 고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어 있는 점, 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첨자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에는 아미타불을 전각의 가운데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여 그 위에 봉안하고 있고 좌우 협시보살은 모셔져 있지 않다. 단지 불단에는 높이 100cm정도의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불단의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高宗)37년인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는 가로 195cm, 세로176cm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5cm폭의 흰 테두리를 두르고 중앙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그려 전체적으로는 아미타불의 관배를 감싸듯이 배치된 구도를 가지고 있다. 탱화의 표현 기법은 본존불의 경우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고 상체보다 두부(頭部)를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까지 들어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었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왼손은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는데 손가락 끝이 뾰족하지만 우아한 곡선미를 간직하고 있다. 광배는 원형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그렸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은 본존불을 향하여 약간 틀어 앉은 자세를 취하고 머리에는 화불(化佛)이 그려진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왼손은 연꽃 줄기를 잡고 있다. 우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칭되는 자세를 취하고 보관(寶冠)에 보병(寶甁)을 표시하고 경책을 받쳐들고 있다. 본존불의 두광 좌우에 합장한 아난과 가섭존자가 상반신만 표현되어 있고, 그 위로 화면의 여백없이 구름을 화려하게 그렸으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는 광선을 그려넣었다. 탱화하단 중앙에도 한덩이 구름을 그려서 아미타여래가 극락세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 | |
고금당(보물제449호)
보물 제449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금당은 극락전 앞 서쪽에 세워져 있다. 이 건물은 동쪽에 있는 화엄강당과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에 의하여 건축되어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화엄강당과는 달리 기둥과 기둥의 간격이 좁고 기둥의 키가 높은 구조를 하고 있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연적으로 쌓은 축대 위에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았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공포는 익공에 가까운 주심포계이며 가구는 고주가 없는 7량가이다. 정면 3칸에는 칸마다 2짝으로 된 띠살문을 달았다. 어간 문의 크기는 중앙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어 좌우의 띠살문보다 높이가 조금 더 크다. 측면과 뒷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고 뒷면의 좌우 협칸에 외문의 띠살문을 달았다.
공포의 구성은 기둥 위에만 포작을 짜올린 주심포계 구조를 택하고 있으며 주두 밑에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 주두 위에서 나온 살미첨차를 포개 놓았다. 이 위에 도리 방향으로 일출목의 행공첨차를 얹어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는 관계로 익공계로 이해되기도 한다. 측면의 가구는 벽 중앙에 귀기둥보다 약간 긴 원형의 고주를 놓아 대들보를 받치고, 대들보 위에 짧은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쳤으며, 이 위에 다시 짧은 기둥을 세워서 마루도리를 떠받치고 있다. 도리와 장여를 길게 밖으로 빼내어서 측면 지붕에 깊이감을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엄강당에는 대들보와 마루보 사이에 조그만 살창을 두고 있지만 고금당에는 없다.
이것은 화엄강당이 판고 등으로 쓰이던 건물이어서 측벽에 살대를 꽃은 통풍창이 있는데 반하여 고금당은 선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살창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좌측면에는 아궁이를 내어 난방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내부는 3칸 통으로 공간 활용을 넓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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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강당(보물제448호)
이 건물은 스님들이 교학을 공부하는 장소인 봉정사의 화엄강당으로 온돌방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17세기에 중수되었는데 스님들의 강학공간인 화엄강당도 함께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건물 내부는 남쪽 2칸이 부엌, 북쪽 4칸이 온돌방으로 되어있으나 원래는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현재의 온돌방 뒤쪽으로 4칸의 마루가 깔려 있으며 부엌이 지금보다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평면 구성이 언제 오늘날처럼 바뀌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며 1930년대 이후로만 짐작될 뿐이다.
대웅전 앞 경내에 들어서면 왼쪽에 화엄강당이 동향으로 세워졌으며 그 후면은 극락전의 앞쪽이 된다. 장대석 댓돌 위에 두꺼운 널판을 쪽마루와 같이 깔았는데 사분합의 띠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중앙칸과 북쪽칸은 하나로 통해서 넓은 온돌방이다. 나머지 남쪽칸은 부엌으로 만들었으나 그 박공쪽 벽을 헐어서 내부를 확장하였으므로 건물 원래의 모습이 약간 상하게 되었다.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므로 대웅전 등의 불당에 비교하여 매우 낮은 기둥을 사용하였는데 그 대신 공포의 치수를 보통 이상으로 크게 잡아 건물의 균형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측면에는 중앙에 네모기둥 1개를 세워서 대들보를 받치도록 하였으며 이 대량과 그 위의 동량과의 사이에는 살창을 하나 만들었다. 정량위의 마루대공 좌우에는 소슬창이 보인다. 박공머리에 나와있는 도리 밑을 받친 첨차들은 그 전부가 다 포집 계통의 첨차들이다.
무량해회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집에 전면과 남쪽에 마루를 놓고 양쪽의 중앙에 칸벽을 설치하여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요사이다. 남쪽 면에는 축단 밖 단하로 튀어나온 열주(烈柱)로 받쳐진 누와 후면 내정 쪽에 쪽마루가 연결되어 통로는 3면에 이어졌다. 해회당 몸체에서 약 2미터 가량 띄어 'e'자를 뒤집은 형태로 요사가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형' 평면을 이룬다.
안마당을 둘러 싼 북쪽의 방사 모서리에 '염화실'이라 한 작은 편액이 붙어 있다. 2칸 방과 작은 대청 그리고 단칸방 둘이 꺾여 북동쪽을 막아 섰고 4칸의 넓은 부엌은 동남 모서리에 돌출된 남쪽으로 3칸통의 큰 방을 만들어 시중과 대중방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정에 면한 본채는 겹처마와 익공이 가구된 비교적 높고 당당한 건물이나 ㄷ자의 후원 요사 부분은 홑집으로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안마당을 향한 본채 뒷면 각방에는 띠살문 옆에 살대를 꽂은 광창이 설치되어 내정의 분위기를 아담하게 꾸며준다. 요사란 절에서 스님들이나 신도들이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불사를 관리하고 강당, 선당에서 수행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의식주를 뒷받침해 주는 생활공간이며 휴식공간이다.
만세루(시도유형문화재325호)
누문은 대부분 이층으로 건축되며 아래층은 사찰의 중정으로 통하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하며, 윗층은 산사의 전망을 감상하거나 목어(木魚), 운판(雲版), 범종(梵鐘), 법고(法鼓)등을 걸 수 있는 종루(鐘樓)나 고루(鼓樓)의 기능을 겸하기도 한다.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아 가구의 노출을 방지하고 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이층 누각식 건물로 일층인 아랫부분은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츳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우하주는 누상주에서 사용한 것보다 더 굵은 부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보이며 사찰의 중정으로 오르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만세루는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 판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로서의 기능을 한다. 목어는 나무를 깎아서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을 파내어 비게 한 다음 그 속을 막대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불구이다. 염불과 독경이나 예배할 때 쓰이는 것으로 물속에 사는 고기들을 구원하고 수중중생의 해탈을 위하여 두드리는 것이다. 불사에 쓰이는 이 기구를 목어라고 이름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옛날 덕이 높은 고승의 제자 하나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속된 생활을 하다가 그만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 어느날 스승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 물고기가 나타나 전생의 죄를 참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등에 달린 나무를 없애주기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 물고기는 다름아닌 말썽을 부린 제자가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스승은 가엾게 생각하여 수륙재를 베풀어 등에 난 나무를 없애주었다. 그날 밤 제자는 스승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업보를 벗겨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고 자신의 등에 난 나무를 깍아 물고기 형상을 만들고 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듣는 수행자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게 될 것인 동시에 물에 사는 물고기들을 구원하는 소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스승은 제자의 말대로 목어를 만들고 여러 행사에 두루 쓰이는 법구로 삼았다.」고 한다.
종각
종을 걸어두는 누각으로 종루(鐘樓)라고도 불리 우며, 사찰의 의식도구인 사물(四物 :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걸어놓고 각종 불교의식의 시작과 끝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사용하는데 봉정사는 범종만 달아놓음.
민간 신앙에 있어서도 물고기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장석이나 노리개에 잉어 형상이 새겨지고 장농이나 소품들에도 잉어문양을 많이 사용한다. 이것은 물고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을 감지 않으므로 물고기의 속성을 따라서 도난을 방지하는 부적으로 주로 사용한다. 불교에 있어서는 수행자들로 하여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행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물고기 형상의 목어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법고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구원하고 해탈하라고 치는 북이다. 북을 받치고 있는 북대는 구름 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운판은 날아 다니는 짐승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구름의 형태로 만들어서 걸어두고 친다.
범종은 지옥에 빠진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울리는 것이다. 이상 네 가지 범종, 운판, 법고, 목어를 사물이라 한다. 누에는 '덕휘루(德輝樓)'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어 이 누문의 이름이 덕휘루였음을 알 수 있으나 언제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층석탑(시도유형문화재 제182호)
극락전의 정면에 있는 고려시대 중엽에 조성된 탑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중 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부분은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탑의 총 높이는 318cm이다.
2층 기단(基壇)을 쌓아 탑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기단에 비해 폭이 좁아진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 크기가 위로 갈수록 적당하게 줄어들면서도, 폭의 변화는 적다.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고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일부만 남아있다.
봉정사 만세루로 올라가기 에 있는 소나무(호수)
2009.11.28 순례길에서...
봉정사는 아름답다. 화려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