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6.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때 고승 자장율사가 당나라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 운제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정골사리(頂骨舍利), 치아(齒牙), 불가사(佛迦裟), 패엽경(貝葉經) 등을 전수받아 귀국하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영축산 통도사 그리고 태백산 정암사에 봉안하였다고 전하며, 불가에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알려진 사찰은 많지만 특히, 이 다섯 곳을 5대 적멸보궁이라 부르고 있으며, 대표적인 성지순례코스가 되고 있다.
(붉은병꽃)
어떤 사람은 걸어서 5대 적멸보궁을 순례하기도 하고, 또 어느 스님은 10보 1배의 심악참회 순례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순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이루어 진다. 물론 오대산 적멸보궁은 상원사에서부터는 걸어서만 갈 수 있고 설악산 봉정암은 먼 길을 등산하듯이 걸어서 올라야 한다.
나는 이미 몇차례 5대 적멸보궁을 순례한 터라 좀 더 의미있는 순례를 위하여 5대 적멸보궁 순례와 함께 적멸보궁을 품을 산들을 천천히 걸어 오르며 산의 정기와 부처의 향기를 느껴보기로 하고, 그 첫번째 순례지로 함백산과 정암사를 가기로 하였다. 정암사는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이 일러 준 '태백산 갈반지'에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태백산 정암사 일주문)
묵호를 떠나 정암사에 도착하니, 11시 30분쯤 되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암사 일주문에 걸린 '太白山 淨岩寺'라는 현판이다. 근대를 대표하는 학승이신 탄허큰스님의 글씨다.
참배할 때마다 정암사는 참 고요하고 아늑한 느낌을 받는다. 개울을 건너 독립공간으로 있는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108배를 한다. 절을 할 때마다 이마가 땅에 닿는다. 더이상 낮출 수 없을 때가지 나를 낮추는 下心으로 살고자 서원을 하고 참회를 하며 절을 하다보면 20여분이 소요되는 108배가 금새 끝나버린 느낌이 든다. 일반적으로 법당에는 부처님을 모시지만,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다. 정암사 적멸보궁은 도 지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적멸보궁 뜰에는 자장율사의 지팡이라고 일컬어지는 주목나무가 있다.
(정암사 적멸보궁)
돌계단을 따라서 수마노탑으로 올라간다. 염불을 하며 수마노탑을 세바퀴 돌고서, 주변 풍광과 정암사의 가람배치를 살펴본다. 참 좋은 시절인연이다. 탐진치 삼독에 찌들어 사는 중생이지만, 이 순간만은 순수한 영혼이 지배하는 맑은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수마노탑은 보물 제410호로 지정된 국가문화재로서, 정암사의 가장 높은 곳, 적멸보궁 뒤쪽으로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터에 서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마노석으로 만든 탑이라 하여 마노탑이라고 한다. 전체 높이가 9m에 이르는 7층 모전석탑으로 탑 전체가 길이 30~40cm, 두께 5~7cm 크기의 회색 마노석으로 정교하게 쌓아져 언뜻 보면 벽돌을 쌓아 올린 듯하다.
(정암사 수마노탑)
또 하나 정암사계곡에는 청정지역에서만 서식한다는 천년기념물 제73호인 열목어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인연이 없어서인지 아직 한번도 열목어를 보지는 못했다.
관음전을 참배하고 공양간에 가서 점심공양을 하고 차를 몰고 만항재를 향하여 올라가다가 적조암입구 공터에 주차를 하고 함백산 산행을 시작한다(입구에 '등산로 입구'라는 간판이 있음). 집을 떠나온지 5일차, 날마다 걸었으니 몸이 많이 지쳤지만, 산의 기운이 몸의 기력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 믿기에 천천히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일이라 인적이 없는 고요한 숲속길을 홀로 걸어 올라가는 허허로움이 나는 좋았다. 적조암갈림길에서 적조암을 다녀올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체력을 아껴야겠다는 생각과 예전에 다녀왔던 기억을 떠 올리며 산행을 계속한다. 해발1,200m의 함백산 중턱에 있는 적조암은 자장율사의 열반처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암자라기보다는 조립식 건물형태의 토굴수행처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다만, 자장율사가 왜 이곳에 머물렀으며 열반처로 택했을까를 생각하면서 적조암터를 둘러보는 것도 순례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만항재 어딘가에 자장율사의 유골함이 묻혀 있는 석혈중(石穴中)이 있다고 한다.
함백산(咸白山)은 태백시 소도동과 정선군 고한읍의 경계에 솟아 있는 해발 1,573m의 산으로 우리나라에서 여섯번째로 높은 산이다.(한라산 1,950m, 지리산 1,915m, 설악산 1,708m,덕유산 1,614m, 계방산 1,577m)
높이로만 본다면 함백산(1,573m)은 이웃한 태백산(1,567m)보다 6m나 더 높지만, 태백산을 모산(母山)으로 삼아 스스로 태백산의 종산(從山)임을 자처한다. 산이름 자체도 '크게 밝다'는 태백(太白)을 쫓아 함백(咸白)이라고 불린다.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정암사가 함백산에 있지만, 일주문에는 '태백산 정암사'라는 현판을 내걸고 있는 사실이 오랜 옛날부터 태백산이 함백산의 모산임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함백산의 옛이름은 '묘고산'이라고 한다.
(함백산 주목)
함백산의 주능선은 백두산에서 발원한 우리국토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흐름을 두문동재에서 이어받아 만항재에서 태백산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두문동재는 해발1,268m의 고개로서, 예전에는 태백시와 정선군 고한읍을 넘나드는 주된 차량통행로였으나 지금은 두문동터널이 개통되어 차량통행이 뜸하다. 안개가 자욱하게 서린 가랑비 오는 여름날, 금대봉 야생화 탐방을 위하여 두문동재에 올라 자연의 신비로움을 맛보며 술한잔에 낮잠 한숨을 즐긴 일이나, 눈이 소복히 쌓인 겨울 날 두문동재에서 금대봉을 거쳐 삼수령으로 홀로 걷던 백두대간길의 설레임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빈봉산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개풍군지'는 만수산의 서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 72인이 은둔했고, 빈봉산의 동두문동에는 무신 48인이 숨어 살았다고 전한다. 이들을 출사 시키려고 회유하던 조선의 태조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두 곳의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불에 타 죽고 살아남은 일곱 충신이 흘러간 곳이 바로 함백산 아래 고한 땅이었다. 그들 또한 변함없이 이 산골짜기로 들어간 이후 바같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여 '두문동(杜門洞)'이라 불리고 있으며,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난 유래이기도 하다. 두문동재에는 도로가에 '백두대간 두문동재'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두문동재에서 함백산을 오르다 보면 상함백 또는 은대봉으로 불리는 천의봉(해발1,142m)이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낙동강의 발원지인 태백시 <황지>에서 물길을 거슬러 10km를 더 올라 간 천의봉 아래에 낙동강의 최장 발원지라고 새롭게 밝혀진 '너덜샘'이 있다.
적조암갈림길을 지나 다소 가파른 길을 걸어서 능선안부에 오르고, 산허리길을 돌아서 가면 두문동재와 함백산 정상으로 가는 삼거리길에 닿는다. 편안한 숲속길을 걸는 재미가 익어 갈 무렵, 바위전망대로 올라서게 되지만 미운 것이 안개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중함백을 넘어 함백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는 천년은 넘었을 듯한 주목이 멋진 자태를 드러낸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썩어서 천년을 산다고 했던가? 함백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올라서면 태백산, 금대봉과 매봉산, 백운산과 두위봉 등 해발 1,400에서 1,500m급의 거대하고 웅장한 산군들이 사방으로 펼쳐지지만, 짙은 안개로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조차 없음이 아쉽다. 하긴, 산에서의 즐거움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만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긴 하지만...또 하나, 햄백산은 만항재에서 정상 바로 밑까지 차량통행이 가능한 포장도로가 개설되어 있다는 것인데 포장도로는 길은 길이되, 오솔길처럼 자연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파괴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위정자들이 알았으면 한다.
(함백산 정상)
만항재로의 하산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포장도로를 걷지 않고도 갈 수 있는 오솔길이 있어 그 길을 걷는다. 6월 초순이었다면 철쭉이 만개하여 화사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을 그 길에는 철쭉 대신 갖가지 야생화들이 피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함박꽃)
만항재는 태백과 영월, 고한을 넘나드는 해발 1,330m의 고개다. 특히, 만항재는 우리나라에서 차량으로 넘을 수 있는 포장도로중에서 가장 높은 고개이기도 하다. 만항재에는 야생화식물원이 있어 낮에는 들꽃을 감상하며 쉬어가기에 좋고 밤에는 별이 아름다워 밤하늘을 수놓은 별꽃을 감상하며 쉬어 가기에 좋은 곳이다.
만항재에서 적조암갈림길로 가는 방법은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 길밖에는 없다. 물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어 내려 간다. 지나가는 차량 한대가 멈춰선다.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면 함께 타고 가자고 한다. 더불어 사는 참 좋은
세상에 흐뭇한 기분이 들었지만 걸어서 가겠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만항마을)
해발 1,200m의 도로변에 위치한 조그만 산골마을인 만항마을에는 토종닭 요리 등이 주메뉴인 식당이 몇군데 있다. 마을에서 가장 좋은 건물은 마을회관이다.
숲속길을 걷는데 비하여 포장도로를 걸으면 걷는 재미가 반감되지만, 산중길을 차량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더 자연스러운 행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른한 오후가 되어서야 출발점으로 돌아와 영월땅 사자산 법흥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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