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순례

상주 노악산 남장사/관음선원

행운57 2009. 9. 1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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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30

 

남장사는 상주시 남장동 502번지 노악산(노음산이라고도 부름) 기슭에 소재하는 조계종 산하의 전통사찰로 상주 4장사(尙州 四長寺, 북장사, 갑장사, 승장사 - 현재는 없음)의 하나이다.

830년(흥덕왕 5) 당나라에서 귀국한 진감국사가 개창하여 최초로 머문 사찰로 당시의 절 이름은 장백사(長栢寺)였다. 1186년(고려 명종16) 각원화상이 장백사를 남장사로 개칭하면서 중창하였다.

진감국사는 중국 종남산에서 범패를 배워 830년인 57세때 귀국하여 장백사에 머물면서 832년에는 무량전(현, 보광전)을 창건하고 범패(불교음악,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한 노래)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급한 곳이다. 당시 의원에 환자가 모이듯이 구름같이 많이 모였다 하며, 이 범패는 판소리, 가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성악곡중의 하나이다.

종전에는 경남 하동의 지리산에 있는 쌍계사가 최초 보급지로 알려 졌으나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 대공탑비(최치원이 지음)'의 비문에 상주 장백사로 되어 있어 상주 장백사가 범패의 최초 보급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요 유물로, 철불 좌상(보물 990호)과 목각 후불 탱화(보물 922호) 등의 불교 예술의 걸작품을 보존하고 있으며, 일주문은 지방문화재자료 442호(2003)로 지정되어 있어, 불교 예술의 보고라 일컬을만 하다.

경내에는 1797년(정조 21)에 창건된 관음선원이 있는데,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각 후불탱(보물 923호)을 보존하고 있다. 이는 화주승 '희선'이 1694년(숙종 20)에 북장사 뒷편 상연암에서 제작되었다가 1819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북장사 사적기)
당초 도지정문화재 58호로 지정되었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각탱으로 평가를 받아 보물로 승격되었다.
이 목각탱도 종전까지는 1782년에 조각된 지리산 실상사의 '약수암 후불탱(보물 421호)'으로 알려 졌으나 남장사 관음선원의 목각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노악산 기슭에는 1624년(인조 2)에 창건한 중궁암이 있다.(상주시청 홈피에서 자료 발췌)

 

 

남장사 보광전

 

 

 

남장사 보광전 목각탱(보물 제922호/1987.7.16일 지정/조선시대 작품)

 

(일반설명)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불화를 그려 족자나 액자형태로 만들어 거는 그림인데, 이 탱화는 종이나 비단이 아닌
 나무를 조각해서 만든 목각탱이다.

이 목각탱은 가로 236㎝, 세로 226㎝, 두께 10∼12㎝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보광전의 후불탱화로 사용되고
있다. 길쭉한 나무판 8장을 연결하여 연꽃 위에 앉아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4단씩 3열로 10대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을 계단식으로 배치한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보살상들은 모두 머리에 보관을 쓰고 꽃가지를 들고 있으나 한 분만 합장하고 있으며 관음과 대세지 보살은
 연꽃 위에 앉았고 다른 인물들은 서거나 무릎을 꿇고 있다. 각 인물들 사이에는 연꽃과 꽃봉오리 등으로
장식하였고 가운데 있는 본존의 머리 위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솟아올라 2줄기로 갈라져 있다.
 
몸에 비해 큰 사각형의 각진 얼굴과 가는 눈, 작은 코, 넓은 귀 등은 오려 부친 듯 묘사되었고 앞으로 숙인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상주 남장사 철불좌상(보물 제990호/1989.4.10일 지정/조선시대 작품)

 

 

 

(일반설명/문화재청)

경상북도 상주시 남장사 보광전에 모셔진 철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지금은 불신만 남아있다.

얼굴은 단아하며 어깨에 닿을 듯 긴 귀는 목에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와 잘 조화를 이루어 위엄을 자아낸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부드럽게 흘러내려 양쪽 무릎을 덮고 있는데, 주름은 팔과 다리의 끝부분에만
나타났을 뿐 대담하게 생략하고 단순화시켰다. 손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상과 비교하여 손의 위치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엄숙한 얼굴 표정, 치마를 묶은 띠매듭, 왼쪽 어깨에 드리워진 U자형 옷자락, 단아한 얼굴, 장대한 체구 등은
조선 초기의 불상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조선 철불상의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남장사 영산전

 

 

 

 

 

 

 (남장사 일주문/상주시 문화재자료  제442호/편액은 해강 김규진 글씨)

 

(남장사 극락보전)

 

 

 (극락보전내부) 

 

(남장사 석장승/시도 민속자요 제33호)

 

 

장승은 마을입구나 사찰입구에 세워 잡귀와 액운의 출입을 막고 사찰내의 재산과 경계를 표시하는 민간신앙물로, 마을에서는 수호신의 기능을 겸하기도 한다.  남장사 입구에 서 있는 이 돌장승은 원래 남장동에 있었는데, 1968년 저수지 공사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옮겨놓은 것이다.
높이 186㎝의 크기로,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 다듬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비뚤어진 얼굴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왕방울 눈과 커다란 주먹코, 야무지게 다문 입술에 송곳니는 아래로 뻗어있다. 가슴에는 한가닥의 수염이 있으며 그 밑에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성난 표정을 표현하려 했으나 그 보다는 소박함과 천진스러움이 엿보이는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작년도는 장승 앞면에 ‘임진 9월입’이라는 기록과 조선 철종 7년(1856)에 지은 남장사 극락보전 현판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순조 32년(1832)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남장사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없으므로 남장동을 지키기 위한 수호신으로서 이 장승을 세운 듯하다.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탱(보물 제923호/1987.7.16일 지정)

 

(일반설명/문화재청)

이 목각후불탱은 조선 숙종(肅宗) 20년(1694)에 조성된 것으로, 그 예가 드문 귀중한 자료이다. 장방형의 판목
 가운데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4보살(四菩薩), 2비구(二比丘), 사천왕(四天王), 구름을 타고 모여
드는 타방불(他方佛) 등이 고부조(高浮彫)로 새겨진 아미타극락회상(阿彌陀極樂會上) 목각탱(木刻幀)이다.

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가늘게 뜬 직선적인 눈, 오려 붙인 듯한 코와 입 등에서 이색적인 느낌이 들 만큼
무표정하다. 또한 하체, 상체, 두부(頭部)의 각 부분이 모두 반듯한 사각형적인 형태로 비사실적인 인체 표현
이 돋보인다. 이와 같은 특징은 당대의 불상양식을 대변하고 있으며, 그 배치구도에서 당시 불화와 비교할 수
 있다. 이처럼 조각을 회화적(繪畵的)으로 표현한 목각후불탱이 새로운 감각으로 조선 후기에 대두한 점은
높이 평가되며, 이 가운데 연대가 올라가는 이 작품은 뛰어난 목조각기술(木彫刻技術)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관음선원)

 

 
(관음선원은 남장사에서 가까운 거리의 중궁암가는 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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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사단법인 우리땅걷기에서 보내 온 메일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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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악산 남쪽기슭에 운치 있는 아기자기한 암벽들을 배경삼아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신라고찰 남장사는 식산 이만돈(1664~1732)이 지은 <남장사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제42대 흥덕왕 7년(832년)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당나라에서 돌아오던 진감국사가 노악산에 머물면서 장백사를 창건하고 무량전을 지으면서 큰 절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기록이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문 중 실상사 진감국사의 비문에 실려 있다.

 

그 후 1186년(명종16) 각원국사가 지금의 터로 옮겨짓고, 절 이름을 남장사라고 바꾸었는데 이는 북장사北長寺, 갑장사 등 상주지역의 4장사 중의 하나로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1203년에 금당을 신축하였고 1473년에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인조 13년 정수선사가 3창을 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다. 남장사는 불교가 융성하던 고려 때까지 번성하다가 조선초기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세가 약화되었다. 그 중에서도 태종은 배불정책을 과감하게 단행하여 궁중의 불사를 폐지하면서, 전국의 242개 사찰만 남겨둔 채 그 이외의 사찰은 폐지하였다. 동시에 그 절에 소속되었던 노비와 토지를 몰수 하였고, 왕사와 국사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11종의 종단을 7종으로 축소하였다. 그 후 연산군은 성 안팎의 사찰 23개를 헐어버리고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다가 문종 때에 이르러 문정왕후의 섭정에 힘입어 선․교 양종을 부활시켰지만, 문정왕후 이후 탄압이 계속되었다.

 

근근이 사세를 이어가던 남장사는 임진왜란 때 빼어난 활약상을 펼친 사명대사가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그 당시 금당이었던 보광전에서 수련하면서 선종과 교종의 통합도량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1978년 7월 영산전의 후불탱화에서 주불(主佛)과 16나한상을 조각할 때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 4과와 칠보류들을 봉안했다는 기록과 함께 사리 4과 및 칠보류가 발견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절 건물들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영산전․보광전․금륜전․향로전․진영각․강당․일주문․불이문 등이 있고, 부속암자로는 관음전과 중궁암이 있다.

 

남쪽에 남장사, 북쪽에 북장사를 안고 있는 이산을 남장사 쪽에서는 노악산 남장사라고 부르고 북장사쪽에서는 천주산 북장사라고 부르고 있다.

북장사는 현재 낡고 퇴락한 요사 채와 새로 지은 대웅전과 명부전 그리고 산신각만 남아 있어 바라보기가 안쓰러운 절이지만 이 절은 신라 흥덕왕 8년(833)에 진감국사가 남장사를 창건하고서 이절을 창건하였다는 사적기를 지니고 있는 신라의 고찰이다.

 

「북장사 사적기」에는 이 절이 있는 산의 이름을 천주산이라고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산 위에 수미굴이 있고, 그 가운데에 저절로 생긴 돌기둥이 있는데 아래는 좁고 위는 넓어서 마치 하늘을 괴어 받친 기둥처럼 보일뿐만 아니라 교태스럽고 괴이한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서 잇는 모습이다. 또한 구름과 안개를 마시기도 하고 토하기도 하기 때문에 천주산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이 산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는데, 옛 절터의 기왓장에서 천주산이라는 명문(銘文)이 출토되어 옛부터 명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창건이후 이 절은 수미암, 상련암, 은선암 등의 부속암자를 가진 나라에 이름난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하여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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