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138번지에 위치한 고위산 천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의 말사다. 퇴락한 법당과 요사채를 현 주지스님이 손수 다듬어 불법을 전하고 있다.
(천룡사 소개)
서남산의 최고봉인 고위산(高位山) 정상 부근에 자리한 천룡사는 신라시대 때 쳔녀(天女)와 용녀(龍女)라는 두 딸을 가진 부모가 딸들을 위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신라시대에 천룡사가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까지 존숭되던 곳이며, 석가 만일도량(萬日道場)이 열릴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다.
그런 만큼 옛기록에도 천룡사에 대한 언급이 많이 보이는데, 천룡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와 이곳에 주석 했던 여러 고승에 대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한편 천룡사에서 열렸던 석가 만일도량에 관해서는 고려 때 최승로가 지은 글이 남아 있어 참고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천룡사가 쇠퇴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조정의 대신들이 발원하였고,또한 국가의 태평을 기원하였다.이곳에 헌납한 밭을 납입전(納入田)이라고 불렀으며,당시 큰 사찰의 납입규모를 밝혀 놓았다.10,000일이면 거의 30년에 해당하는 셈인데,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법회가 열렸던 것이다. 최승로의 글에는 또한 천룡사의 주지 자격도 명시되었는데,계행이 투철하고 재주가 뛰어나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신라의 대표적 사찰 가운데 하나인 천룡사가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려의 재상 최승로의 아들 최제안이 천룡사를 중건한 이야기가 전하므로 고려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지만 그 뒤의 역사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어 아쉬움을 준다(「설화」 참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천룡사는 고위산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15세기에는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고, 최근 절터에서 1548년(명종 3)에 만든 명문기와가 발견되었고, 천룡사에서 1688년(숙종 14)에 ?묘법연화경?을 간행한 바가 있어 조선시대 중기까지 계속 법등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 어떤 연유에선지 폐사가 되었던 듯하면, 근래에 들어와 천룡사 옛터 부근에 사찰이 중창되었다.
한편 천룡사 옛터에는 밭 가운데는 폐탑의 석재들이 나뒹굴고 있으며, 탑신이나 지붕돌 등은 비교 적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천룡사 대웅전
고위산의 암릉이 용이 되어 천룡사로 내려오고 있는 모습
배바위
천룡사 전경